작성일
2018.03.07
수정일
2018.03.07
작성자
송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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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을 보는 시각

<국제신문> 2016년 1월 14일자 인문학 칼럼입니다.

통섭을 보는 시각
송성수(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과학기술학)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문과와 이과의 교류가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계기 중의 아마도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10월에 타개한 잡스는 자신의 성공을 인문학(humanities) 혹은 교양(liberal arts) 덕분으로 돌렸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그것과 바꾸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문과와 이과의 연결을 주장한 사람은 제법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쓴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을 들 수 있다. 윌슨의 책은 1998년에 발간되었고, 2005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는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 보려는 노력이다.”고 강조하면서, 지금의 대학생들이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류의 복지에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윌슨의 통섭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통하는 섭리를 생명과학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학문간 대화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다양한 학문을 특정 분야로 환원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대해 “포섭하여 통제한다.”는 뜻을 가진 윌슨의 통섭(統攝) 대신에 “두루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통섭(通涉)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심지어 통섭은 지적 사기에 불과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윌슨식의 고유명사인 통섭이 아니라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convergence)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통섭의 의미를 둘러싸고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를 헤쳐 나갈 단서는 19세기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휴얼(William Whewell)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휴얼은 1840년에 출간된 <귀납적 과학의 철학>에서 ‘통섭’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통섭을 “더불어 넘나든다.”는 의미로 규정하면서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성장을 강에 비유한 바 있다. 여러 갈래의 냇물들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먼저 밝혀진 진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합쳐지고 결국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윌슨의 통섭과 휴얼의 통섭은 다르다. 윌슨의 통섭이 환원적 통섭(reductive consilience)이라면 휴얼의 통섭은 합류적 통섭(confluent consilience)인 셈이다.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키면 통섭에도 여러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면 통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문과와 이과의 결합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통섭의 세부적인 유형으로는 혼성(hybrid), 수렴(convergence), 복합(composition), 융합(fusion) 등을 들 수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축전지와 가솔린을 교대로 사용하면서 달리듯이, 한 분야와 다른 분야를 병행해서 탐구하는 것이 혼성에 해당한다. 수렴은 복수의 분야에서 공통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복합의 경우에는 빼빼로 과자와 같이 복수의 재료가 결합되어 새로운 것을 만들지만 원재료의 속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융합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되어 물이 합성되는 것처럼, 복수의 분야가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처럼 통섭에는 매우 다양한 유형이 존재하며, 처음부터 복합이나 융합과 같은 높은 수준의 통섭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발상으로 보인다.

왜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 화두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모방이나 추격의 단계를 넘어 창조의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창의성은 복수의 분야나 관념이 서로 만나서 섞일 때 발현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이 우리가 통섭에 주목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정보, 생명, 환경 등을 매개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과학기술자와 인문사회과학자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댈 때 풀릴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

통섭은 새로운 인재의 유형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다. 21세기 인재의 유형으로는 I자형 인간 대신에 T자형 인간이나 H자형 인간이 거론되고 있다. 한 가지 전공만 깊게 파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뻗어나가거나 이공계 전공자와 인문사회계 전공자가 서로에게 팔을 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선결조건이 다양한 학문에 대한 학습과 이해에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T자형 인간이 개인의 통섭에 주목하고 있는 반면, H자형이 집단적 통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통섭이 뛰어난 개인의 전유물이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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