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04.21
수정일
2017.04.21
작성자
송성수
조회수
937

사회진화론의 일생

<국제신문> 2016년 7월 14일자로 실린 인문학 칼럼입니다.

<사회진화론의 일생> 송성수(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서양에선 침탈 정당화, 동양에선 방어 역할로
다윈은 어떤 입장일까

진화는 생물학에서 시작된 후 다른 영역에도 널리 활용되어 온 개념이다. 특히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19세기 중엽부터 오랫동안 위세를 떨친 사회사상에 해당한다. 같은 텍스트라도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듯이, 사회진화론자들은 진화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다윈은 진화가 진보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회진화론자들은 진화를 진보의 동의어로 간주했던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1859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전부터 제기되었다. 영국의 철학자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1851년에 발간된 ≪사회적 정역학≫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제창했다. 그는 사회적 진화의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며, 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종의 자연적 진화를 막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스펜서는 ≪종의 기원≫을 읽은 후 1864년에 발간한 ≪생물학의 원리≫을 통해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개념을 사용했으며, 다윈도 186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 5판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살아남은 개체가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몇몇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펜서는 생물이나 사람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존재를 가장 우수한 것으로 간주했다. 사실상 다윈은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여러 종이 진화되어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스펜서는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생물이 하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진보한다는 목적론적 주장을 펼쳤다.

사회진화론은 점차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다윈주의자를 자처했던 통계학자인 피어슨(Karl Pearson)은 “인류의 지식이라는 공동 자산에 자신의 몫을 제공하지도 않는 검은 피부의 종족을 유능하고 건장한 백인 남성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유감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당시의 서양인들은 다윈이 사용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는 개념을 인종 차별에 활용하기도 했다. 흑인과 같은 유색 인종을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이어주는 고리로 취급했던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우생학과도 연결되었다. 다윈의 사촌인 골턴(Francis Galton)은 1869년에 우생학을 제창하면서 좋은 형질을 극대화하는 긍정적 우생학과 나쁜 형질을 최소화하는 부정적 우생학으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20세기에 들어와 초점이 주어진 것은 부정적 우생학이었다. 미국의 우생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인종의 이민이 미국의 장래를 위협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1924년에는 앵글로색슨을 제외한 민족의 이민을 제한하는 존슨 이민법이 통과되었다. 독일에서는 1932년부터 사회적 부적격자를 거세할 수 있는 법안이 시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정부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통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동양에서는 엔푸(嚴復)가 1898년에 발간한 ≪천연론(天演論)≫을 통해 진화론이 소개되었다. ≪천연론≫은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인 헉슬리가 1894년에 발간한 ≪진화와 윤리≫를 번역하면서 해설을 가한 책인데, 엔푸는 스펜서의 시각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재구성했다. 엔푸는 사회진화론의 과학적 토대가 다윈의 진화론에 있다고 믿었으며, 열등한 상태에서 우등한 상태로 변화하는 직선적 진보를 진화로 받아들였다. 이어 1903년에는 량치차오(梁啓超)가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발간하면서 양육강식의 세계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량치차오의 문집이 전파되면서 진화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박은식은 1906년에 당시의 상황을 “진화, 생존경쟁, 약육강식이 공례(公例)가 되는 시대”라고 요약하면서 나약한 한민족이 제국주의 열강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신채호(申采浩)는 1931년에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란 유명한 말을 통해 우리 민족이 실력양성에 힘을 쏟는다면 국권회복의 기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1934년에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윈의 기일(忌日)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칭하면서 과학으로 조선을 부흥시키자는 대대적인 운동을 벌였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특정한 방향으로 ‘진보’하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과학의 이름으로 인류 사회의 생존경쟁을 바라보는 틀을 제공했다. 사회진화론은 서양에서는 제국주의적 침탈이나 인종주의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반면, 동양에서는 약소민족의 분발을 촉구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서양의 사회진화론이 공격적 성향을 보였다면, 동양의 사회진화론은 방어적 성격을 띠었던 셈이다. 만약 다윈이 사회진화론의 일생을 목격했다면,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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